어느 날 택배회사에서 일하던 한 남자가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표류한다.
모든 게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마침내 생각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한다.
먼저 택배 상자를 열고, 가지고 있는 물건의 리스트를 작성했다.
매일 시간에 얽매여 살아가던 남자. 무인도에서 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이야기다.
영화 속 남자처럼 문제 상황에 부딪힌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Written by 전민서 Photo by 이수연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생각을 확장하기 위해 마인드맵을 자주 활용했다. 하나하나 가지를 뻗어 나가는 걸 볼 때마다 뿌듯하기도 하고, 친구들보다 풍성한 생각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여전히 어쩌면 예전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지금, ‘어떻게 생각할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때다.
재밌게 공부하고, 즐겁게 일하는 법
인간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이왕 하는 일이라면 행복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인문학 강연자, 스윙 댄서, 보드게임 해설가, 파티 플래너, DJ, 방송 패널…. 톡톡 튀는 개성의 이 직업들을 모두 가진 남자가 있다. 본업은 문화비평가 및 작가지만 계속해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찾고 있다는 이명석 작가다.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걸 좋아했고, 대학교에서는 철학을 전공 했어요. 주로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거나, 체험한 내용을 책으로 써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글을 쓰고, 제가 키우는 고양이에 관한 에세이를 썼어요. 10년간 스윙 댄스에 빠졌을 때는 해외 댄스 페스티벌에 나가기도 했고요.”
그가 세상의 놀거리를 인문학 지식과 결합해 글로 풀어내는 것만큼이나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직접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이다. 청소년들에게 인문학 강연을 하면서 또 다른 생각의 길을 찾게 됐다.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면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요,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선생님처럼 놀면서 일하며 살 수 있을까요’를 자주 물어봐요. 그래서 이런 것들에서 근본적으로 필요한 게 뭘까 생각해보니 바로 ‘생각하는 힘’이더라고요. 무슨 일을 하든 이런저런 방식으로 생각해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잖아요. 남의 춤을 배울 수도 있지만 직접 안무를 짜서 공연을 하려면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해야 하고요. 아이들도 놀면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데,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생각놀이 워크숍’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보드게임을 하고, 돌림판을 만들어서 표적을 맞히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해보니 시각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생각놀이 워크숍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생각할 때 쓰는 도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도구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진짜’만 뽑으니 68가지로 정리됐다.
직사각형 안의 작은 세상
생각하는 도구를 어떻게 시각화할지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카드였다. 카드는 예전부터 그와 인연이 깊었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모양도 크기도 각양각색인 카드의 매력에 푹 빠져 수집을 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제가 어릴 때는 화투패를 직접 만든 적도 있어요. 할머니한테 화투를 배워서 집에서 누나랑 화투를 하고 노는데, 엄마가 화를 내시면서 아궁이 불에 넣어버렸어요.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재밌는 게임을 하는 건데. 밤새 분이 나서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누나가 그림을 잘 그렸는데, 다음날 둘이 달력을 오려서 직접 화투패를 만들었어요. 쉬운 게임이지만, 48장의 카드 안에 세계관이 담겨 있다는 게 매력적이더라고요.”
68장으로 이루어진 ‘생각하는 카드’에는 어떤 세계관이 담겨 있을까. 생각하는 카드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에 앞서 이명석 작가가 추천하는 첫 번째 카드는 ‘이름 붙이기’ 카드다.
“우선 생각거리를 끄집어내 보세요. 뭔가 일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우당탕하고 있으면 통제가 안 되죠. 끄집어낸 머릿속 생각들에 하나하나 이름표를 달아보는 거예요. 오늘 제 머릿속에는 인터뷰하기, 사진 찍기, 끝나고 약속 가기 등 해야 할 일도 있고, 아침부터 목이 칼칼하다, 감기가 올 수도 있으니 비타민 먹어야겠다 등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거든요. 이렇게 생각마다 이름을 붙이다 보면 몇 개의 그룹으로 분리할 수 있게 돼요. 그다음 ‘쓰레기통’ 카드를 사용해 쓸데없는 건 버린 다음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는 겁니다.”
유명한 투자자 워런 버핏은 자신이 남보다 잘하는 것으로 ‘부탁 거절하기’를 꼽았다고 한다. 거절을 못 하면 다른 사람에게 끌려다니기 쉽기 때문이다. 주도적으로 생각을 정리해나가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생각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리자.
그에게 평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카드를 묻자 망설임 없이 ‘리스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어떤 일이든지 일단 리스트를 만들고 나면 편안하게 해결이 된다고 했다.
“고등학생 친구들이 공부할 때 보면 수학 문제를 풀면서 귀로는 영어단어를 듣고 외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능률적으로 시간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한 가지씩만 할 수 있을 때 바로 리스트가 필요한 거죠. 하루에 공부할 내용을 리스트로 적어보는 거예요.”
생각하는 도구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생각하는 카드로 만든 것처럼 공부해야 할 내용은 스터디 플래너에 정리하면 도움이 된다. 다양한 디자인의 실용적인 플래너가 많으니 골라 쓰는 재미도 있을 테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절대 꾸준히 쓸 수 없다는 것.
“무언가를 정리할 때 쌓아두면 하는 데 힘이 들 수밖에 없어요. 집안일도 그렇고 그때그때 해두면 수월해요. 혼자 하기 힘들다면 친구나 가족들과 약속을 해서 하루에 20분은 정리만을 위해 사용해보세요. 거기에 익숙해지면 하루가 깔끔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마음이 편하면 또 일이 더 잘되기 마련이고요.”
"무언가를 정리할 때 쌓아두면 하는 데 힘이 들 수밖에 없어요. 집안일도 그렇고 그때그때 해두면 수월해요. 혼자 하기 힘들다면 친구나 가족들과 약속을 해서 하루에 20분은 정리만을 위해 사용해보세요. 거기에 익숙해지면 하루가 깔끔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마음이 편하면 또 일이 더 잘되기 마련이고요."
생각하는 힘 키우기
몇 년 전 서울 광장에서는 제1회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당시 우승자는 초등학생이었다. ‘역시 초등학생들은 정말 생각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초등학생의 사연이 궁금했던 한 프로그램에서 우승자를 찾아갔다. 아이는 하루에도 학원을 4~5군데를 다니며 보통 어른보다 바쁘게 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오빠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오빠 대신 많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더 열심히 지냈던 것이었다. 머릿속이 너무 꽉 찬 상태로 긴장된 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머릿속이 하얘지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가끔 멘붕을 겪곤 하죠. 그런 상황에는 무조건 쉬어야 해요. ‘일 미루기 위원회’라는 카드를 쓰는 겁니다. 어떤 일을 단번에 처리하려고 하기보다는 당장은 쉬는 게 훨씬 좋다는 거예요. 쉬면 일을 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무의식 속에 계속 생각하고 있거든요.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도 풀리지 않는 일이 있으면 그냥 잔다고 말하더라고요.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딱 해결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제 경험상으로 봤을 때도 그런 것 같아요.”
생각놀이 워크숍을 통해 만난 학생들에게도 그는 같은 조언을 해주었다. 무조건 밤늦게까지 공부하기보다는 적당히 공부하고, 약간의 고민거리를 만들어 놓고 잠자리에 들라는 것. 자는 동안 몸은 휴식을 취하고 머리는 기억을 재생해 아침에 일어나면 나도 모르게 문제가 해결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생각들을 점과 점으로 연결하는 ‘링크’ 카드는 생각의 습득이 빨라지는 비결 중 하나다.
“역사 문제를 보면 사건의 순서대로 나열하는 문제가 있잖아요. 그게 의미 있는 순서면 잘 외워져요. 암기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전체의 구성을 잘 이해할지 떠올려보세요. 저도 학교 다닐 때 역사나 지리를 교과서에 나오는 것만 외우기보다는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면 관련된 책을 찾아봤거든요. 5만큼 깊이의 시험문제가 나온다면 7이나 8 정도로 깊게 파놓는 거죠. 교과서에 나온 지식과 책에 나온 지식이 연결돼서 오히려 이해가 잘 됐어요.”
이명석 작가가 키우는 고양이들은 올해로 19살과 20살이 되었다. 그는 고양이들이 5살 때 썼던 <고양이라서 다행이야> 에세이의 개정판을 올해 낼 예정이다. 글 쓰는 일은 혼자 하는 일이라서 지루하고 힘든 순간이 많지만 생각하는 카드를 꺼내놓고 대화하면서 게임하듯 즐길 생각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생각하는 도구를 쓰는 게 익숙하지 않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삶을 사는 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예요. 막상 해보면 대부분 이미 해본 방법이거든요. 또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도구를 다양하게 사용하다보면 어느새 자신의 생각하는 힘이 자란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 출처: 교육매거진 <앤써> http://www.answerz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