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사람들은 서예가 어렵고 지루한 옛날 글씨라고 생각한다.
사실 다가가고 싶어도 접할 기회조차 많지 않았던 것.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손으로 그린 문자라는 뜻을 가진 ‘캘리그라피’ 장르가
유행하면서
서예에 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이정화 서예가는 “서예가 산이라면, 캘리그라피는 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산에 가서 이 꽃 저 꽃을 보고 즐기며 천천히 정상에 다다르면,
결국 그 산에 대해서도 궁금해할 거라는 믿음에서다.
두 가지 모두 글씨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하면서도 서예는 한 글자, 심지어 한 획 안에도 정성과
예술성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Written by 전민서 Photo by 이수연
서서히 스며들다
7살 때부터 글씨를 배운 아이가 있었다. 서예가인 아버지 덕에 서예를 일찍 접하기는 했지만, 아이가 자라서 서예가가 되어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기 까지는 직접 얻은 깨달음의 역할이 컸다.
“아버지가 일찍이 서예를 하셔서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의 글씨를 보고 자랐어요. 제 밑에 동생이 둘 있는데, 항상 동생들과 같이 서예를 배웠죠.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쓰라고 하면 별 의미 없이 서예가를 적었거든요. 그러다가 한번은 중학교 때 아버지와 세미나에 가게 됐어요. 그때는 캘리그라피가 이렇게 부흥하지 않았을 땐데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글씨들이 있더라고요. 아버지께 저건 뭐냐고 여쭤봤더니 저것도 서예라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네가 아직 붓과 친해지는 과정이지만 나중에 더 배우면 저런 것도 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날의 기억은 먹이 종이에 번지듯 그녀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이후 전시나 세미나에 스스로 찾아다니며 서예가 단지 글씨만 쓰는 게 아니라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됐고, 본격적으로 서예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서예를 하다 보니 느낀 건 옛날 선현들의 글씨를 따라 쓰는 것도 좋지만, 서예가는 예술가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는 거였어요. 서예를 한다고 하면 원래 있는 좋은 시를 따서 쓴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왜 서예는 예술에서 배제될까?’에 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서예를 통해 한글을 더 재미있게 표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고요. 나름의 고민을 하다 보니 서예는 자연이랑 연관된 부분이 많더라고요. 저는 예술은 다 자연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음악은 자연의 소리에서 나오고, 미술은 자연의 색에서 나오고, 서예는 자연의 선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능선이나 바닥의 길을 보면 글씨와 참 닮았거든요. 이런 감성이 저뿐만 아니라 요즘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예를 ‘자연의 선’이라 정의한 그녀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 어쩐지 서예와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자연과 서예, 그사이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
긴 획을 써내려가다
이정화 서예가는 최근 더 많은 사람에게 서예를 알리는 데 푹 빠져 있다. 자신이 느낀 서예만의 매력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과도 나누고 싶어서다. 이를 위해 작품, 강연, 드라마·영화 대필 등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이나 각자의 환경에 따라 서예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반가운 향수를 느끼는 어르신들에게나,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들에게나 모두 존재하는 그 사람만의 감수성을 이끌어내고 싶다고 했다.
“강연할 때 서예를 주제로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자연을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저도 서예를 하면서 자연을 많이 보게 됐고, 그 안에서 깨달은 게 많거든요. 모든 사람에게 서예를 하자고 외치면서 서예의 부흥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요(웃음). 무엇이 됐든 자기만의 마음속 쉼터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자연을 많이 보고 정말 자연이 큰 예술이라는 걸 깨닫기를 바라요.”
자연의 어떤 부분에 특히 매료되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문방사우 중 하나인 먹을 직접 만들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항상 저에게 하신 말씀이 ‘먹의 색은 검은색이 아니라 하늘의 색이고, 우주의 색이고, 현(玄) 색이다. 자연의 모든 색을 모으면 현 색이 된다’였어요.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먹을 만들어 보기로 했죠. 나뭇잎과 꽃을 모아서 으깨고 빻아서 굽기까지 했는데, 결국엔 그냥 흙이 된 거예요. 그때 머리를 ‘띵’하고 맞은 기분이었어요. 제가 직접 꽃도 따고 나뭇잎도 따서 같이 빻았기 때문에 이 흙 안에 다 들어있다는 걸 알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흙은 그냥 흙이고,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다’라고 생각했던 거죠. 자연은 정말 돌고 돈다는 걸 깨달았고, 옛날 선현들이 왜 그렇게 자연을 좋아했는지도 알게 됐고요(웃음).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연을 보는 방법을 전하고, 잠깐 멈추고 쉬는 법, 내려놓는 법을 이야기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정화 서예가는 드라마나 영화의 대필 활동을 시작한 지도 꽤 되었지만 오히려 촬영할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고 했다. 처음에는 화면에 자신의 글씨가 나오는 게 그저 신기하고 좋았다면, 갈수록 더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글씨에도 관심이 높아지니까 정말 사람들이 제 글씨를 본다는 게 실감 나더라고요. 그럴수록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크죠. 촬영장에 가면 감독님이 촬영하는 장면의 상황을 설명해 주시거든요. ‘지금 독화살을 맞았어요, 혼이 나고 시험을 보는 상황입니다’라고요. 화면에 배우의 얼굴이 나오지 않아도 감정을 표현해야 하니까 그런 부분을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독화살을 맞았는데 제 글씨가 예뻐 보이고 싶다고 너무 잘 쓰면 안 되잖아요(웃음). 드라마 한 편 중 15초는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한 편을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나 시간을 생각하면 상당히 중요한 파트라고 생각해요.”
"오늘 책에서 ‘나에게 의심이 있으면 아무리 강한 날개라고 해도 날 수가 없다’는 구절을 봤어요.
안 될 것 같다고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서 가장 큰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상도 사실은
정말 별거거든요. 다치지 않았고, 오늘 여기에 존재하고 있잖아요. 그것만으로 우리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거죠."
나의 길을 간다는 것
“요즘은 나만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에만 집중하다 보면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을 하든 올바른 태도와 건강한 마음을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중학생 때만 해도 그녀는 중국어 통역사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 덕분에 집에 찾아오는 중국인 손님이 많았고, 조금씩 어깨너머로 중국어를 배우다 보니 자연스레 갖게 된 목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멋진 이미지나 겉모습만 보고 중국어 통역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왜 좋아하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요. 결국엔 다행히 제 길을 찾았죠. 저와 같이 서예를 배웠던 둘째는 경찰행정학과에서 공부하고 있고, 고3인 막내는 이제 열심히 진로를 찾고 있는데 진지하게 중국어를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똑같이 글씨를 배우고 썼지만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해요.”
다수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걸어 나가며 때로는 새삼 막막함을 느끼는 그녀지만,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듯 ‘다 잘 될 거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곤 한다.
“오늘 책에서 ‘나에게 의심이 있으면 아무리 강한 날개라고 해도 날 수가 없다’는 구절을 봤어요. 안 될 것 같다고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서 가장 큰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상도 사실은 정말 별거거든요. 다치지 않았고, 오늘 여기에 존재하고 있잖아요. 그것만으로 우리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거죠.”
사계절을 한 자리에서 버티고 선 소나무처럼, 진흙 속에서도 불평 없이 피고 지는 연꽃처럼. 그대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믿는 것. 이정화 서예가가 자연에게서 얻은 마음이다. 그녀의 꿈은 훗날 많은 이들에게 ‘저 사람은 원로 서예가였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원로 서예가라는 말은 한평생 서예를 위해서 살고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사실 서예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제가 작품 활동 외에 다른 활동들을 하는 게 탐탁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어떤 방식이 됐든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서예를 알리기 위해 노력할 거고, 죽을 때까지 글씨를 쓰는 게 목표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길, 매일 같은 곳에서 하늘을 보더라도 다르게 보려고 노력한다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하늘의 색, 구름의 모양, 공기마저도 매일 다른데 왜 그동안 다 같은 하늘일 뿐이라고 무심히 넘겼던 걸까. 비로소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 출처: 교육매거진 <앤써> http://www.answerz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