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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만 사랑이 되고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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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소개
고수리 작가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작가

너무 작은 것들까지 사랑하지는 말라는 말이 있다. 

작은 것들은 하도 많아서 당신이 사랑한 그 많은 것들이 언젠가 모두 당신을 울게 할 거라고. 

이 말을 듣자 이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낯선 이의 뒷모습에서 문득 슬픔과 행복을 읽어내는 사람이다. 

크거나 작고, 좁거나 넓은 등과 맞닿은 제 시선에 얼마간 온기를 더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언제나 조금은 척척하게 젖어 있을 것만 같은 고수리 작가의 마음이 괜히 염려되었다. 

그녀식으로 표현하자면 이것도 ‘선한 오지랖’으로 볼 수 있을까.  3년 만에 다시 만난 고수리 작가는 말했다. 

삶이 잠시 고난에 빠져 있더라도 따뜻하고 다정함이 스며드는 순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고. 

찰나 같이 불어오는 봄날의 바람이 그 말에 힘을 실어주는 듯했다. 

계절이 거듭되는 동안 사람도, 삶도 더 기꺼이 껴안아온 그녀와의 만남을 이곳에 풀어본다.

Written by 윤혜은  Photo by 김소연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2016)에 이어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2019)까지. 고수리 작가가 세상에 꺼내놓은 이야기는 우연히도 모두 ‘우리’라는 대명사로 시작하고 있다. 그녀에게 우리란 누구일까. 가족, 친구, 동료, 스승을 모두 담고도 그녀의 우리는 한없이 넓고 깊어 보인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위로받은, 앞으로도 위로받을 모두를 더해보면 어떨까. 당신도 그녀의 말과 글을 곱씹다보면 그 행간 어디쯤에 무작정 기대어 보고 싶어질 것이므로. 


다시 만난 우리

고수리 작가의 첫 책은 춘분이 시작될 무렵, 꽃샘추위를 달래며 독자를 찾아갔다. 꼬박 3년이 지나 그녀는 같은 계절에 두 번째 책을 펴냈다. 그 사이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고, 글로 맺은 인연들은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새봄의 한가운데에서 출간 후 한 달간의 소회를 물었다.

“셋째를 막 낳은 기분이에요(웃음). 그것도 갓 태어난 신생아를 돌보는 심정이랄까요. 너무 기쁘고 사랑스러운 한편 조심스럽기도 하죠.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는 것만큼 마음을 많이 쓴 이야기들이 묶여 있어요. 아직도 만감이 교차하네요.”

무려 쌍둥이를 출산한 그녀는 당시 고위험 산모로 거의 안정만을 취해야 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가벼운 외출이나 글쓰기는커녕 짧은 독서조차 엄두내지 못했다고. 고수리 작가의 근황은 미혼의 기자가 감히 짐작할 뿐 결코 체감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27개월 만에 비로소 자신만의 시간이 생겼다고 미소 지은 작가는 이내 어린이집에서 생애 첫 사회생활을 하느라 애쓰고 있는 아들들의 시간을 걱정했다. 와중에 그녀의 일상에 작지만 확실한 지분을 차지해온 시간을 엿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달빛 같은 시간으로 상상됐다. 엄마로서의 몸짓이 익숙해져가는 그녀 뒷모습에 동그랗게 드리워지는 빛처럼.

“작년 7월부터 ‘금요글방’이라는 모임을 이끌어가고 있어요. 제 방공호 같은 자리라고 소개할 수 있는데요. 2주에 한 번, 금요일 저녁마다 말과 글을 나누고 있답니다. 주로 이삼십 대 직장인들, 그리고 자녀를 둔 어머니들과 함께 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바깥 세계와 단절된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좋아하는 ‘글’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갖고 감정과 마음을 주고받는 시간이 무척 절실했거든요. 금요글방을 시작하면서 모종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었어요. 그곳에서 만난 인연이 제 책에 자연히 녹아들기도 했죠. 또 학교나 도서관에서 책 만들기와 같이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도 지도하고 있어요. 모두 대단한 열정으로 참여하세요. 백여 편이 넘는 시를 홀로 써온 일흔의 할아버지 앞에서는 겸허해지고, 마흔이 넘어서 설렘을 느낄 수 있음에 감격하는 중년 분들을 볼 때는 저도 같이 행복해지죠.”

영화 <패터슨>에서는 등장인물이 “당신을 위한 시(詩)이니까 ‘사랑시’겠지?”라고 책을 선물하는 장면이 있다. 고수리 작가와 책을 만드는 이들 또한 대부분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고자 글을 쓰고 있단다. 저마다 내용은 달라도 결국 ‘사랑책’을 만드는 셈이라고, 작가는 영화처럼 아름다운 장면이 우리네 일상에 자리하는 모습을 기대했다. 그렇다면 고수리 작가의 책도 사랑책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녀로부터 사랑을 건네받은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제 첫 책의 독자 중 한 분이 생각나네요. 당시에 그분이 대학생이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구매를 미루다가 아르바이트 비용을 받자마자 책을 사 읽었다고 메시지를 보내셨거든요. 이번에도 새 책이 출간되자마자 독서 인증을 해주셨죠. 거창한 리뷰는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독자에 가까운 분인 것 같아요. 폴란드의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라는 시인은 ‘내가 생각하는 독자는 중산층이나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 당장 주머니에 얼마가 있는지 확인하고 책 한 권을 살 때에도 살까말까 주저하다 읽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어요. 제 책을 읽은 그분도 이런 고민을 거쳤을 것을 생각하면 그 마음이 깊이 와 닿는 거죠. 제게도 그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더 감사한 마음이 들고요.”


아이가 있는 풍경 속에서 지은 글

잘은 모르지만, 일단 엄마가 되고 나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어도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 유대감을 나눌 수 있는가보다. 나아가 고수리 작가는 엄마로서의 자신을 마주할수록 엄마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모든 여성들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전에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의 세계에서 함께 호흡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태도의 말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소설가 이기호 씨가 이런 말을 하셨더라고요. 아이를 낳고 나서 가장 달라진 점이 무어냐는 질문에 ‘기쁜 건 더 기뻐지고, 슬픈 건 더 슬퍼진다’라고 대답한 대목이 정말 공감됐어요. 저도 다른 부모의 마음으로부터 감화되는 순간을 많이 경험하거든요. 감수성이 짙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감정의 폭이 점점 더 넓고 깊어지는 것 같아요. 이러한 체감이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엄마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의 확장. 더욱이 글을 쓰는 엄마라면 더없는 축복이리라. 그러나 이 소회를 털어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들이 고단하게 흘러갔을까.

“문득문득 자유롭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죠(웃음). 원하는 환경에서 글을 쓰고, 홀가분하게 걸어가는 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글을 쓰는 데에 쏟을 수 있는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져가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글쓰기의 흐름이 자주 끊길 수밖에 없죠. 모든 공간에 아이들이 있다 보니 제 공간이 사라졌다는 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어요. 새 책에 담긴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이들이 잠에 들면 널브러져 있던 장난감을 재빨리 치우고선 소파에 기대 쓴 글들이에요. 바닥난 체력을 모아가면서라도 쓰지 않으면 제 자신이 사라질까봐 무서웠거든요. 간절함을 원동력으로 써내려갔어요.”

아이가 태어난 뒤로 온통 육아 이야기, 혹은 엄마 이야기만 써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고. 그런 우려가 무색할 만큼 새 작품에는 두 존재에 대한 비중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상하게 제 자아가 흐릿해질 것을 두려워하다보니 오히려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내 안에 남아 있는 이야기를 찾게 되더라고요. 한날은 엄마가 농담으로 첫 책에 비해 이번 책에선 자신의 비중이 줄어들었다고 서운해 하실 정도였죠(웃음). 제가 엄마로서 겪어가고 있는 것들과 저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훗날 따로 묶어서 낼 계획이에요. ‘엄마’라는 카테고리를 오래 들여다본 다음에요.”

딸은 결국 엄마를 닮도록 태어나는 걸까. 머리가 커갈수록 학창시절 그토록 진저리를 치던 엄마의 모습이 내게서 언뜻 비칠 때, 내 표정에서 그녀의 나이든 얼굴을 발견할 때. 딸은 엄마가 아주 보고 싶어진다. 고수리 작가에게도 그런 날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젊은 날, 엄마와 함께 한지에 시를 적고 창문마다 붙이던 어느 늦가을의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이니까. 

“엄마가 없었다면 저는 글을 못 썼을 거예요. 엄마가 저를 늘 쓰게 했고, 또 앞으로고 계속 쓰게 만들 거란 걸 알아요. 어떻게 보면 엄마가 제 글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죠. 엄마는 사랑을 받기보다는 주는 타입의 사람이에요. 이제는 저도 엄마가 되어 아이 양육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하고 있는데, 결론은 늘 같아요. 엄마가 제게 그랬듯 두 아들에게 ‘온전한 내 편’이 되어주고 싶어요. 어릴 적에 받은 좋은 사랑이 그 아이를 좋은 어른으로 자라게 한다고 믿거든요. 요즘의 저를 돌아보면 엄마가 제게 전해준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느낄 수 있어요. 그 사랑이 저를 키우고 또 글을 쓰게 했구나…하고 말예요.”



"아이와 소통하기 시작한 요즘 같아서는 매일을 조금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요.  

첫째는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보니 제가 실수로 장난감 블록을 밟아서 조금만 ‘아야’ 소리를 내도 금세 달려와 저를 살펴요.  반면 자신만의 세계가 확실하고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시간이 긴 둘째는 저조차도 그 아이의 내밀한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런데 한 번은 둘이서만 산책을 하게 됐는데 밑동을 드러낸 나무가 ‘잘린 나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옆에 앉아 토닥토닥 나뭇결을 쓰다듬는 거예요. 아이들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귀하고 소중해서 전부 다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이에요."




내 안에 가득한 머무르는 마음

그녀를 글 쓰게 만든 사람이 엄마라면, 그녀의 글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 스승은 따로 있었다. 고수리 작가는 어둡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글이 있고, 어두운데다가 비수 같은 글도 있다고 말하면서 과거의 자신은 후자의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 방송작가로 지낸 시기가 그녀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결의 글을 쓰게 만들었다고.

“<인간극장> 팀과 함께 하는 동안 베테랑 선배님들로부터 프로그램과 출연자, 즉 콘텐츠를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어요. 출연자분들의 고유한 삶을 해치지 않도록 수개월 동안 통화를 거듭하고 또 정성스럽게 글을 쓰시던 모습이 아직도 인상 깊어요. 앞으로 사람과 삶에 대해서 쓰고자 할 때에는 이런 자세가 필요 하다는 것을 체득하게 됐죠. 에세이를 주로 쓰고 있지만 여전히 방송작가로도 틈틈이 활동하고 있어요.”

그 시절에 만난 다양한 삶의 면면이 고수리 작가의 오늘에까지 긴 여운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그녀는 국악버스킹 다큐 프로그램에 메인작가로 참여하면서 상을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캐릭터 작업에 참여한 유아·어린이 채널에서는 시나리오 작가로 몽글몽글한 동심을 풀어내고 있었다. 매일의 삶에 자리한 드라마에 조금씩 무뎌지는 이가 있는 반면, 익숙한 리듬으로 흘러가는 하루를 붙잡고 작은 파동을 더하는 사람도 있다. 고수리 작가를 계속 작가로서 남게 하는 힘을 물었다.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만든 문장이 있어요. 글방의 읽기자료에서도 인용한 김연수 작가의 말인데요.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읽는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라고 해요.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거죠. 그러니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멋진 위로죠. 어떻게든 쓰는 쪽을 택하도록 용기를 준 문장이라 기억하고 있어요. 실로 과거의 제가 썼던 글들이 지금의 저에게도 말을 걸어오는 걸 보면 쓰는 데에 주저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 당장은 내가 쓰는 문장이 마음에 안 들거나 낯부끄러울 수 있고 더러는 아프기도 하겠지만 언젠가는 다른 얼굴로 제게 손짓할 거라고 생각해요.”

고수리 작가와의 만남을 손꼽으면서 이미 읽은 그녀의 책을 몇 번이고 펼치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요 며칠 곁에 둔 책 제목을 곱씹던 어느 날, 그녀는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되고야 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작가가 되고, 엄마가 된 고수리. 그녀는 또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저는 언제고 글을 계속 쓰고 싶어요. 에세이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장르에 매이지 않는 글을요. 원래는 동화를 쓰고 싶어서 공부를 잠깐 한 적도 있거든요.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된 먼 훗날에는 동화를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보면 글감도 많이 생길 테니까요(웃음). 스웨덴의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도 딸이 7살 때 폐렴에 걸리자 함께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말광량이 삐삐》의 시작이라고 해요. 이후로 쭉 동화작가의 길을 걸었고요. 그런데 실은 린드그렌이 미혼모였다고 해요. 일찍부터 자신의 삶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그녀가 그토록 동심 가득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제게 큰 울림을 줘요. 저도 이 삶을 잘 살아내다 보면 동화를 쓰는 귀여운 할머니로 나이들 수 있겠죠?”

은은한 백발을 부드럽게 빗어 넘긴 고수리 작가를 상상해본다. 작가가 제 이야기와 함께 짙어져가는 것만큼이나 그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볼 수 있는 독자의 노년도 퍽 행복할 테다. 그러나 아직은 고수리 작가를 붙잡아두는 모든 순간이 그녀 곁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물기를 바라보기로 한다. 먼 미래가 지금의 사랑 속에서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아이와 소통하기 시작한 요즘 같아서는 매일을 조금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요. 첫째는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보니 제가 실수로 장난감 블록을 밟아서 조금만 ‘아야’ 소리를 내도 금세 달려와 저를 살펴요. 반면 자신만의 세계가 확실하고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시간이 긴 둘째는 저조차도 그 아이의 내밀한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런데 한 번은 둘이서만 산책을 하게 됐는데 밑동을 드러낸 나무가 ‘잘린 나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옆에 앉아 토닥토닥 나뭇결을 쓰다듬는 거예요. 아이들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귀하고 소중해서 전부 다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이에요.”

고수리 작가는 마지막 인사로 최근 자신이 공감했던 소설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글 쓰는 엄마의 자아를 위로해준 그 메시지를 모든 일하는 엄마들에게 돌려주고 싶단다. “엄마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가져야 해요. 자신을 찾아가는 데에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구도 완벽할 순 없죠. 그저 지금도 충분히 잘 해내는 사람이라고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 출처: 교육매거진 <앤써> http://www.answerzo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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