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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를 가르치면 '0'을 아는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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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가르치면 '0'을 아는 벌

“어떤 면적을 똑같은 모양으로 나누면서 그 둘레가 가장 작게 하려면 무슨 도형을 써야 할까?”
이 문제는 기원전 36년 고대 로마 철학자인 마르쿠스 베로의 기록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정육각형이 답일 거라는 추측은 있었지만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어요. 그러다 1999년에 이르러서야 토마스 할스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수학과 교수에 의해 증명됐죠.
그런데 만약 수학자가 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면 이 문제가 좀 더 빨리 풀렸을지도 모릅니다. 2000년이 넘도록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벌은 이미 이 답을 자신의 집에 적용하고 있었으니까요. 벌집의 육각형 구조는 꿀을 저장하기에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튼튼하게 집을 지탱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육각형이 우연히 얻어걸린 건지 벌이 생각한 건지 어떻게 아냐고요? 저도 벌이랑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직접 물어볼 순 없습니다만, 벌의 수학 실력이 보통이 아니란 증거는 좀 더 갖고 있답니다.

사람도 이해하기 힘든 수학 개념을 인지한다

2018년 6월,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꿀벌이 0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논문이 실렸습니다. 연구팀은 그림으로 수를 표현한 종이를 이용해 벌이 더 작은 수를 선택하도록 학습시켰습니다. 동그라미가 더 적은 종이로 가면 설탕물로 보상을 주는 방법을 썼죠. 이렇게 학습된 벌에게 이번에는 빈 종이를 놓고 같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러자 벌들은 가장 작은 수로 빈 종이를 골랐습니다. 빈 종이 뒤에 보상이 있다는 것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다른 작은 수 대신 빈 종이를 고른 겁니다. 이 결과는 벌이 0을 양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논문의 공동저자인 에이드리안 다이어 호주 로열멜버른 공과대학교 연구원은 “0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수학 개념”이라며, “사람도 0을 배우는 데 몇 년이 걸린다”고 말했습니다. 또 “0은 현대 수학과 기술 발전의 핵심”이라며 0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수학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도 이해하기 힘든 0을 특별히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벌의 수학 실력은 역시 보통이 아닌 듯합니다. 0이 수라는 걸 이해하는 벌

외판원 문제는 벌에게 물어봐

0 정도는 간단해 보인다고요? 그렇다면 이 연구에 주목해주세요. 이번엔 수학자도 풀지 못하는 문제니까요.
모든 도시를 딱 한 번만 들르고 출발점으로 돌아올 때 최소비용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찾는 문제를 ‘외판원 문제’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푸는 효율적인 알고리듬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슈퍼컴퓨터로 여러 경우의 수를 계산해서 일일이 비교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죠. 그런데 우리의 수학 천재, 벌은 슈퍼컴퓨터도 없이 이 어려운 계산을 뚝딱 해낸다네요.
2010년 3월, 퀸메리 런던대학교 생물화학과 연구팀은 벌이 먹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외판원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연구팀은 지름 1km 공간에 50m 간격으로 인공 꽃 5개를 배치해 벌의 경로를 추적했습니다. 50m는 벌이 볼 수 있는 범위의 3배를 넘는 거리이므로 눈으로 보고 경로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벌은 여러 번 설탕물을 채취하러 다니는 동안 경로를 기억해 다음에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결정했습니다.
실제 실험 사진. 빈 종이를 선택한 꿀벌의 모습 처음에는 긴 경로로 이동하기도 하고 이미 채취한 곳에 다시 들르기도 했지만, 평균 26회 정도 먹이를 채집하고 나면 모든 벌이 최단 경로를 찾아내 가장 효율적인 거리로 움직였습니다. 벌집에서 나와 5개의 꽃을 방문하는 방법은 총 5!, 즉 5×4×3×2×1=120가지입니다. 그런데 벌은 120가지를 모두 경험하지 않고도 20여 번 만에 어떤 길이 가장 짧은지 계산할 수 있었던 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두 번째 단계에서 드러납니다.
벌의 최적화 경로 실험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인공 꽃에서 나오는 설탕물의 농도를 바꿨습니다. 한 꽃만 설탕물의 농도를 더 높게 조작해서 더 맛있어지게 했죠. 그러자 벌의 경로가 달라졌습니다.
가장 달콤한 꽃을 먼저 방문한 다음 다른 꽃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겁니다. 이때, 벌은 단순히 보상이 가장 높은 꽃을 무조건 먼저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최적화 경로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날아가는 데 드는 에너지보다 얻을 수 있는 먹이의 효율이 높으면 경로가 조금 더 길어지더라도 보상이 높은 꽃으로 향하고(두 번째 실험), 먹이의 가치보다 날아가는 데 드는 에너지가 더 많이 들면 보상이 높은 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최단 경로를 선택해 이동했습니다(세 번째 실험). 정말로 외판원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던 거죠.

첨단 미래로 가는 열쇠=벌

벌의 뇌에는 뉴런이 100만 개 있습니다. 860억 개인 인간과 비교하면 8만 6000배나 적습니다. 그런데도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 수 있고 까다로운 수학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적은 수의 뉴런으로 고차원의 사고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랄스 치카 퀸메리 런던대학교 생물화학과 교수는 “실제 벌은 다섯 송이가 아니라 몇백 송이의 꽃 사이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찾는다”며, “슈퍼컴퓨터를 바쁘게 하는 외판원 문제를 핀처럼 작은 뇌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인간도 복잡한 문제를 더 쉽게 푸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벌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 연구하면 굉장히 효율이 높은 인공지능이나 슈퍼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벌의 움직임을 모방해서 만든 ‘벌 알고리듬’은 지금도 제조공학에서 유용하게 쓰입니다. 먹이를 찾아 나섰던 벌이 벌집으로 돌아오면, 정보를 교환한 뒤 비행 거리와 먹이의 가치에 따라 얼마나 많은 벌이 꽃으로 향할지 결정합니다. 이런 벌의 행동을 모방해서 가장 생산효율이 높은 설비를 찾는 알고리듬을 만들지요. 세계최대 통신 회사인 AT&T도 벌 알고리듬을 웹 호스팅*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서버를 할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동을 그대로 관찰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편리한 기술을 만들었는데, 벌의 사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 슈퍼컴퓨터와 AI를 훨씬 작고 간편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자유자재로 슈퍼컴퓨터를 사용하는 첨단 미래의 열쇠를 벌이 쥐고 있을까요? 벌 선생님, 답을 안다면 수학 한 수 부탁드립니다!

*웹 호스팅: 대형 통신업체가 자신의 웹 서버를 개인 또는 개별 업체에 임대하는 것.

  • 출처 l 동아사이언스 과학동아 (http://www.dongascience.com/)
  • 참고자료 | Andreas Nieder ‘Honey bees zero in on the empty set’, Mathieu Lihoreau, Lars Chittka, Nigel Raine ‘Trade-off between travel distance and prioritization of high-reward sites in traplining bumblebees’, D.T.Pham and M. Castellani ‘The bees Algorithm: Modeling foraging behaviour to solve continuous optimization problems’
  • 글 l 박현선 기자(tempus121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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