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처럼 하얗고 솜털처럼 보드랍고 달콤한 꽃향기가 나는 작은 이불. 손바닥으로 꾹꾹 누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어른들은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인형도 쥐어주고 맛있는 젖병도 물렸지만 이불의 폭신폭신한 느낌이 좋아서 계속 기어 다녔다. 이불을 발로 누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나 보다. 두 발로 일어나려다가 그만 뒤로 벌러덩 넘어지며 머리를 쿵 박았다. 으아앙~!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울음이 터졌다. 내 나이, 만 10개월, 기자의 뇌리에 박힌 인생의 첫 기억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2세 이전 유아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 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거나, 어딘가에 찧어 다쳤다는 등 기자 가 2세 이전의 기억을 꺼내 놓으면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낸 다. 그 시절 사진을 보고 기억을 재구성한 게 아니냐고. 실제로 뇌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성인이 된 뒤에 2세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최근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팀은 2세 이전의 기억이 뇌에 저장돼 있 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유아기 ‘기억 흔적’ 증거 첫 확인
성인이 유아기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의미는 두 가지 경 우다. 어렸을 때 기억이 뇌에서 아예 삭제됐거나, 기억의 흔적 이 뇌의 어딘가에 남아 있지만 떠올리지 못하거나. 그런데 프랭클랜드 교수와 조슬린 교수 연구팀은 유아기 기억이 성인의 뇌에도 남아 있다는, 이른바 ‘기억 흔적’의 증거 를 실험적으로 밝혀내 국제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 7월 23일자에 발표했다.
doi:10.1016/j.cub.2018.05.059 유아기 기억이 지워 진 것이 아니라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연구팀은 어린 쥐에게 하나의 기억을 심고 기억이 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를 뉴런에 남긴 뒤, 성인이 된 쥐에서 이 증거 가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우선 연구팀은 태어난 지 17일 된 쥐(사람으로 따지면 유아 기)를 일정한 공간에 넣고 전기 자극을 줬다. 쥐는 전기 자극 을 받았던 일을 기억해 이후에는 이 공간에 넣기만 해도 긴장 하고 무서워했다. 이 공간에 대한 공포 기억을 학습한 셈이다. 하지만 쥐는 최대 90일이 지나자 이 기억을 잊었다. 그래서 이 공간에 들어가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았다(오른쪽 그림 1). 어릴 때 기억을 성인이 된 뒤 잊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 이미 태어난 지 60일 된 쥐(사람으로 따지면 성인)에 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전기 자극을 주면 15일, 60일, 심지어 90일이 지나도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공간에 쥐를 넣으면 긴장하고 무서워한다(오른쪽 그림 2). 쥐가 공포 경험을 할 때 뇌에서 특정 뉴런들이 활성화되고 그 뉴런들에 기억이 저장된다고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쥐가 특정 공간에 서 전기 자극을 받을 때 해마(치아이랑)에서 활성화하는 뉴 런에 빛에 반응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채널로돕신-2(ChR2)’ 유전자를 심었다.
이 유전자가 만드는 채널로돕신 단백질은 이온채널(세포 막 단백질)의 한 종류로, 파장이 약 473nm(나노미터)인 푸른빛을 쪼이면 채널이 열리면서 나트륨 이온이 세포 안으로 들 어오고 뉴런이 전기적으로 활성화된다. 만약 이 뉴런에 기억 이 저장돼 있다면 빛을 쪼이는 것만으로도 기억이 떠오를 것 이다. 이런 식으로 연구팀은 특정 기억에 대한 일종의 꼬리표 를 뉴런에 표시했다.
연구팀은 쥐가 어렸을 때 전기 자극을 가했던 공간에 다 자 란 어른 쥐를 넣었다. 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채널로돕신으로 표시한 부위에 푸른빛을 쪼이자, 평온했던 쥐 가 전기 자극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공포 반응을 보다(위 그림 3). 뉴런을 직접 자극함으로써 유아기 때 형성됐던 기억이 떠올 랐기 때문이다. 즉, 유아기 기억이 여전히 뇌에 존재하며 다만 회상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교수는 “어렸을 때 기억이 뇌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 거”라며 “기억 흔적을 실험을 통해 밝혀낸 것은 이번 연구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또 “쥐가 공간을 보고 스스 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라며 “유아기 기억이 뇌에 남아 있더라도 성인이 된 뒤 모두 회상할 수 있는 것은 아 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사람은 어떨까. 실험용 쥐는 유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거 의 동일한 상태인 만큼 일정한 자극에 나타내는 행동 패턴도 거의 동일하다. 반면 사람은 개인마다 유전적인 요인이 다르 고 경험도 다르다. 한 교수는 “이런 차이 때문에 인간의 경우 유아기 기억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아기 기억을 떠올 리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서 푸른빛을 쪼여 기억을 불러올 때 해마에 있 는 뉴런은 물론 피질에 있는 일부 뉴런들도 활성화됐다. 이는 기억이라는 작용이 해마뿐 아니라 뇌의 전 역에 걸쳐 있다 는 뜻이다.
프랭클랜드 교수는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성인이 되면 어 릴 때 기억이 ‘잠겨’ 있지만 심리적 요법으로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며 “이번 연구 결과가 프로이트의 주장을 일정 부분 뒷받침한다고도 볼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