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는 평생의 화두가 아닐까.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딸이라는 사회적 위치를 넘어
타인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나 자체로서의 정체성 말이다.
하지만 어딘가에,
또는 누군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에,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찾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오늘 알았던 나의 모습이 내일이면 전혀 다르게 변하기도 하고 불현듯 잊었던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이쯤 되면 애초에 어떤 사람을 한 문장의 서술로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되기 시작한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그 문장은 틀린 것이 될 테니.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Written by 최소희 Photo by 조현서
어렸을 적, 명절날 할머니 집에 가면 먹는 일 말곤 딱히 할 게 없었다. 해가 질 때까지 떡이며 고기, 잡채 같은 음식을 입에 가져다 대는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너무나 지루해져 시장에라도 나가자고 삼촌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계속되는 조카들의 칭얼거림에 삼촌이 생각해낸 대안이 바로 불꽃놀이였다. 작은 구멍가게의 진열대에 쌓여있는 갖가지 폭죽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박쥐’였는데, 불꽃놀이 좀 해본이라면 알 것이다. 그 작은 폭죽이 얼마나 큰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지를.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예측불가능성과 약간의 두려움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즐겁게 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잠시 후, 박쥐가 날기 시작하면 아무데로나 뛰면 된다. 폭죽이 어느 쪽으로 날아올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그 짧은 순간, 그저 어두운 골목길을 수놓는 불빛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에도 불꽃놀이를 즐기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늘 안정적인 생활 패턴에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지루함에 지쳐버리기보다는 위험하더라도 도전하고, 예상치 못한 길에서 넘어짐과 일어섬을 반복하며 그러한 과정 자체에 집중하는 일말이다. 오늘 만난 이남석 작가는 이처럼 삶의 순간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두 시간 남짓, 그와의 대화를 통해 삶의 행복이란 누군가의 인정이나 어떤 성과 없이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대로 어른이 되어도 괜찮을까요?>
인터뷰 전, 이남석 작가의 프로필을 훑어보고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무척 다채로운 활동이력 때문이었다. 심리학을 전공해 사업 기획자, 콘텐츠 기획자, 번역가, 과학·경영 칼럼니스트, 다큐멘터리 자문위원. 게다가 지금은 카페 사장이라는, 예상 밖의 직함까지. 그에 대해 알아갈수록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와 마주 앉은 후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단연 그가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두 분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좋아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과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죠. 저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겪어왔죠. 본격적으로 집필활동에 집중하기 전까지 11년 동안 11개의 직업을 거쳤어요. 더 설명해드리지 않아도 짐작이 가시죠?”
엷은 미소 뒤로 그의 치열했던 지난 시간이 언뜻 보이는 듯도 했다. 계속해서 기로에 놓이게 되는 사람의 고단함. 그것은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리라. 지난 선택에 대한 반추와 회의, 새로운 시작 앞에 선 막막함. 머릿속 한 켠에서 새어나오는 의심과 불안을 등진 채,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어야만 하는 자의 마음. 아버지의 자리에서 맞이한 그의 진로 찾기 여정은 한층 험난하고도 위험한 것이었다.
“길어지는 방황으로 정신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어요. 아내와의 트러블도 잦아졌죠.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정신차려보니 사랑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더군요. 저희 가족에게 꽤나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저의 모습은 할 수만 있다면 지워주고 싶을 정도예요.”
<마음의 비밀을 밝히는 마음의 과학>
그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집필’이라는 하나의 활동으로 그간의 시간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심리학 덕분이었다. 남을 보듯 나의 상황과 감정을 심리학이라는 이론에 비추어 분석하고 비로소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무수한 실패 속에서 제가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심리학 덕분이었어요. 심리학이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넘어졌을 때에 그것을 짚고 일어날 수 있게 해주죠. 당시 저의 행동과 선택을 심리학에 비춰 이해하고 나면 다음번에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게 되니까요.”
그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총 37권의 책을 펴냈다. 평균적으로 일 년에 두 권 이상의 작업을 해온 것이다. 그의 저서 목록을 읽어내려 가다보면 유난히 청소년에 대한 책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 이성보단 감성이 앞서는 청소년들이기에 논리적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필요해서일거란 예상과는 조금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어른들은 그간 겪어온 사회 경험으로 인해 스스로의 가능성에 많은 제한을 두고 있어요. 이에 반해 청소년들은 유연한 존재죠.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제한을 두지 않으니까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의미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어요. 저의 지난 실수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생산적일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아주 의미 있는 일이죠. 제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책을 쓰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무수한 실패 속에서 제가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심리학 덕분이었어요.
심리학이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넘어졌을 때에 그것을 짚고 일어날 수 있게 해주죠.
당시 저의 행동과 선택을 심리학에 비춰
이해하고 나면
다음번에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게 되니까요."
<뭘 해도 괜찮아>
그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커피이다. 커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카페를 차려버렸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엔 마치 개구진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서촌의 작은 골목에서도 안쪽으로 숨어 있는 작은 한옥이 그의 카페 <여기인가>다. 저서 집필과 전국 각지로 강연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숨 돌릴 틈도 없는 와중에도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
“아주 예전부터 커피를 좋아했어요. 맛있다는 커피를 찾아 발품을 파는 것은 물론, 매체에 커피칼럼을 연재하기도 했었죠. 처음엔 자신감 하나로 남양주의 산자락에 오픈했었어요. 당연히 사람이 안 오죠(웃음). 한 번의 실패를 거쳐 지금의 위치에 새 터를 잡게 되었어요. 카페 이름은 한자로 ‘與氣人家’, 직역해서 ‘기운을 주는 사람의 집’이라는 뜻이에요. 카페는 커피라는 매체를 통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춘 거죠.
<여기인가>의 메뉴판은 메뉴구성과 가격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한권의 이야기책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족에 대한 소개는 물론, 직접 개발해 이 세상에 하나뿐인 메뉴들, 그리고 개발 과정에서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술을 공부한 두 딸이 메뉴개발과 인테리어, 마케팅을 담당하며 함께 운영하고 있다고. 또한 요일마다 테마를 더한 모임도 진행하고 있다. 커피 원두부터 시작해 분쇄정도, 로스팅 방법에 따라 나에게 꼭 맞는 커피 취향을 찾는 모임, 감명 깊었던 책의 구절을 가져와 나의 상황에 맞게 고쳐 써보는 글쓰기 모임, 프로 이직러였던 이 작가의 전적을 살려 현명한 이직을 위한 정보를 공유하는 모임 등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다. 글쓰기가 그의 삶에 가치를 더해준다면 카페를 돌보는 일은 곧 그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상을 선물하고 있었다.
“언제나 일과 휴식이 조화로운 일상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 두 가지가 분리되면 사람이 지치게 되더라고요. 고단했던 회사생활 끝에 깨닫게 된 사실이죠. 이전의 저는 사회의 정해진 틀 안에서 행복을 얻어내려 했어요. 다른 대상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행복이었죠. 그렇게 얻어낸 행복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게 돼요. 종국엔 자기 자신을 쥐어짜면서까지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한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을 휴식같이, 휴식을 일같이’ 하는 것이 제 생활 모토입니다.”
<삐뚤빼뚤 가도 좋아>
일류대학의 졸업장, ‘서울시 강남구’로 시작되는 집문서, 혹은 든든한 노후연금 등 종이 한 장으로 이전의 모든 시간이 대변될 수 있는 삶이란 사실 얼마나 단편적인가. 물론 효율과 안정이 중요시되는 현실을 아예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똑같은 목표를 향해 똑같은 길만 걷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재미없는 세상이 그려진다.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다듬어나가는 그인만큼 최종적으로 어떤 모양의 삶을 꿈꾸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저는 포커 게임을 좋아해요. 사실 지금은 내려놓은 패가 더 많은 나이죠. 손에 든 패가 그리 좋지 않아도 히든을 기다리며 베팅을 합니다. 결국 메이드가 안 된다 하더라도 궁금하고 즐거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려고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흔쯤 되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 호기심이 없어져요. 끝이 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언제나 끝이 궁금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흔히들 ‘첫 단추를 잘 꿰어라’라는 말을 한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 특히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시기에는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선택한 직종, 산업에 오랜 시간 머무르며 정형화된 삶의 모습을 고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순간의 선택이 남은 모든 삶의 색깔을 결정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첫 단추를 꿰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일지라도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남석 작가를 자기 안의 수많은 나를 계속해서 발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전혀 새로운 곳에서 발견 될 그의 다음 모습이 궁금해진다.
- 출처: 교육매거진 <앤써> http://www.answerz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