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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 살 기억 여든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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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기억은 만 10개월 세 살 기억 여든까지 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2세 이전 유아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 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거나, 어딘가에 찧어 다쳤다는 등 기자 가 2세 이전의 기억을 꺼내 놓으면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낸 다. 그 시절 사진을 보고 기억을 재구성한 게 아니냐고. 실제로 뇌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성인이 된 뒤에 2세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최근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팀은 2세 이전의 기억이 뇌에 저장돼 있 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허브 셀’ 뉴런이 기억 연결고리 역할

학계에서는 뉴런 하나에 기억이 하나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 할 수 있는 뉴런들끼리 활성화하면서 기억을 저장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과거 ‘쓴 커피를 마셨던 기 억’과 ‘노트북으로 힘들게 숙제 했던 기억’은 서로 다른 경험 이지만, 두 기억 간에 공통적으로 활성화되는 뉴런들(예를 들면 쓴 커피를 마시면서 숙제를 힘겹게 했던 카페 같은 공간) 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기억마다 일정한 규칙이 없이 아무 뉴런이나 활성화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나 물건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갈 때 반드시 허브 공항(국제공항)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뇌 속 네트워크에서는 정보가 오고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뉴런인 ‘허브 셀(hub cell)’이 있다.

뇌과학자들은 허브 셀이 뉴런 네트워크의 중심을 차지하 고 있으며, 거의 모든 뉴런과 연결돼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말하자면 허브 셀은 각기 다른 기억들을 떠올리는 데 공통적 인 연결고리를 기억하게 만드는 허브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령 미국 화배우 제니퍼 애니스톤의 이름이나 사진, 드 라마나 화의 한 장면을 볼 때 뇌에서는 각기 다른 뉴런들이 활성화되지만, 공통적으로 활성화되는 뉴런들이 있다. 이 모 든 정보들의 교집합인 제니퍼 애니스톤을 떠올리게 하는 허 브 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브 셀은 뇌 역 곳곳에서 뉴런들 간의 연결패턴 을 보고 뇌과학자들이 제기한 가설일 뿐이다. 현재 뇌과학자 들은 허브 셀이 정말 존재하고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위치하 는지 입증하기 위해 연구 중이다.

‘신경 생성’ 일어나며 새로운 신경회로 생성

일상생활의 경험 중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몇 가 지뿐이다. 심지어 어제 있었던 일도 가물가물한데, 유아기 때 일 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하다. 사람의 뇌에는 1000억 개나 되는 뉴런이 있다. 이 뉴런들 이 서로 상호작용 해 네트워크를 이루는 만큼 여기서 얼마나 많은 기억이 생성될지는 가늠조차 안 된다. 1000억 개의 점을 찍어놓고 점들끼리 선분으로 잇는다고 상상해보라.

그래서 뇌과학자들은 뇌의 여러 역 중에서도 특별한 대 상이나 공간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기억하거나, 중요한 기억 을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게 하는 ‘기억 강화(consolidation)’ 과정에 관여하는 해마에 주목한다.

오랫동안 이 분야를 연구한 캐나다 토론토대 생리학과 폴 프랭클랜드 교수와 쉬나 조슬린 교수 연구팀은 2014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유아기 기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이유 가 해마에 새로운 뉴런들이 폭발적으로 생성되는 ‘신경 생성 (neurogenesis)’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해마에서 신경 생성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새로운 지식을 왕성하게 학습하는데, 이때 새롭게 생겨난 뉴런과 신경회로가 기존에 있던 신경회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doi:10.1126/science.1248903.

조슬린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낸 한진희 KAIST 생명과학과 교수는 “뇌에서 이성적인 사고나 의사 결정 등을 담당하는 전두엽은 30대 후반까지도 발달하 지만, 학습에 따른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는 특히 사춘기까지 왕성하게 발달한다”고 설명했다.

국제학술지 ‘셀 스템 셀’ 4월 5일자에는 사람의 해마에서는 평생 신경 생성이 일어나지만, 성장기가 끝나면 이런 신경 생 성이 급격히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가 실리기도 했다. 한 교수는 “해마가 급속히 발달하는 사춘기 이전, 가령 유아 기 기억은 신경 생성 작용의 향으로 새로운 뉴런과 신경회로 로 바뀔 수 있다”며 “결국 성인이 된 뒤에는 유아기 기억이 남 아 있지 않거나, 남아 있더라도 희미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유아기 ‘기억 흔적’ 증거 첫 확인

성인이 유아기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의미는 두 가지 경 우다. 어렸을 때 기억이 뇌에서 아예 삭제됐거나, 기억의 흔적 이 뇌의 어딘가에 남아 있지만 떠올리지 못하거나. 그런데 프랭클랜드 교수와 조슬린 교수 연구팀은 유아기 기억이 성인의 뇌에도 남아 있다는, 이른바 ‘기억 흔적’의 증거 를 실험적으로 밝혀내 국제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 7월 23일자에 발표했다. doi:10.1016/j.cub.2018.05.059 유아기 기억이 지워 진 것이 아니라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
연구팀은 어린 쥐에게 하나의 기억을 심고 기억이 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를 뉴런에 남긴 뒤, 성인이 된 쥐에서 이 증거 가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우선 연구팀은 태어난 지 17일 된 쥐(사람으로 따지면 유아 기)를 일정한 공간에 넣고 전기 자극을 줬다. 쥐는 전기 자극 을 받았던 일을 기억해 이후에는 이 공간에 넣기만 해도 긴장 하고 무서워했다. 이 공간에 대한 공포 기억을 학습한 셈이다. 하지만 쥐는 최대 90일이 지나자 이 기억을 잊었다. 그래서 이 공간에 들어가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았다(오른쪽 그림 1). 어릴 때 기억을 성인이 된 뒤 잊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 이미 태어난 지 60일 된 쥐(사람으로 따지면 성인)에 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전기 자극을 주면 15일, 60일, 심지어 90일이 지나도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공간에 쥐를 넣으면 긴장하고 무서워한다(오른쪽 그림 2). 쥐가 공포 경험을 할 때 뇌에서 특정 뉴런들이 활성화되고 그 뉴런들에 기억이 저장된다고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쥐가 특정 공간에 서 전기 자극을 받을 때 해마(치아이랑)에서 활성화하는 뉴 런에 빛에 반응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채널로돕신-2(ChR2)’ 유전자를 심었다.

이 유전자가 만드는 채널로돕신 단백질은 이온채널(세포 막 단백질)의 한 종류로, 파장이 약 473nm(나노미터)인 푸른빛을 쪼이면 채널이 열리면서 나트륨 이온이 세포 안으로 들 어오고 뉴런이 전기적으로 활성화된다. 만약 이 뉴런에 기억 이 저장돼 있다면 빛을 쪼이는 것만으로도 기억이 떠오를 것 이다. 이런 식으로 연구팀은 특정 기억에 대한 일종의 꼬리표 를 뉴런에 표시했다.

연구팀은 쥐가 어렸을 때 전기 자극을 가했던 공간에 다 자 란 어른 쥐를 넣었다. 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채널로돕신으로 표시한 부위에 푸른빛을 쪼이자, 평온했던 쥐 가 전기 자극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공포 반응을 보다(위 그림 3). 뉴런을 직접 자극함으로써 유아기 때 형성됐던 기억이 떠올 랐기 때문이다. 즉, 유아기 기억이 여전히 뇌에 존재하며 다만 회상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교수는 “어렸을 때 기억이 뇌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 거”라며 “기억 흔적을 실험을 통해 밝혀낸 것은 이번 연구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또 “쥐가 공간을 보고 스스 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라며 “유아기 기억이 뇌에 남아 있더라도 성인이 된 뒤 모두 회상할 수 있는 것은 아 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기억 흔적' 확인 실험
사람은 어떨까. 실험용 쥐는 유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거 의 동일한 상태인 만큼 일정한 자극에 나타내는 행동 패턴도 거의 동일하다. 반면 사람은 개인마다 유전적인 요인이 다르 고 경험도 다르다. 한 교수는 “이런 차이 때문에 인간의 경우 유아기 기억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아기 기억을 떠올 리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서 푸른빛을 쪼여 기억을 불러올 때 해마에 있 는 뉴런은 물론 피질에 있는 일부 뉴런들도 활성화됐다. 이는 기억이라는 작용이 해마뿐 아니라 뇌의 전 역에 걸쳐 있다 는 뜻이다.

프랭클랜드 교수는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성인이 되면 어 릴 때 기억이 ‘잠겨’ 있지만 심리적 요법으로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며 “이번 연구 결과가 프로이트의 주장을 일정 부분 뒷받침한다고도 볼 수 있다”고 밝혔다.
  • 출처 l 동아사이언스 과학동아 (http://www.dongascience.com/)
  • 사진 | GIB, 일러스트=동아사이언스
  • 글 l 대전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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